"홍당무! 홍당무!"
앤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길버트를 봤다.
쳐다보기만 한게 아니었다.
앤은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앤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길을 길버트에게 던졌고
화가 난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다음 '퍽'하는 소리가 났다.
앤이 석판으로 길버트의 머리를 내리쳤고
석판이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에이본리 학생들은 늘 이런 소동을 좋아했다.
모두들 놀라면서도 신나서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앤은 11살에 미래의 남편을 만난다. 철천지 원수로 말이다. 사건의 발달은 이러했다. 길버트는 매우 잘생기고 키가 큰 매력적인 남자아이였다. 길버트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한데, 새로온 전학생 앤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않는 것이었다. 길버트는 앤에게 주의를 끌고자 노력해보지만 실패하게 되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바로 앤의 머릿카락 색깔을 두고 놀린 것이다. 사건은 홍당무라고 놀림을 받은 직후에 일어나는데 분노한 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리쳤다.
이 사건도 사건이지만 나는 아이들이 열심히 들고 다니며 집중해서 무언가를 쓰던 석판에 관심이 더 많았다. 무엇이든 귀했던 시절, 아이들은 연습장이 아니라 석판(Slate)을 들고 학교에 갔다. 작은 물병에 물을 담아 글씨를 썼다 지웠다를 하며 아이들은 수학 문제를 풀고 단어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보던 그런 칠판인데 작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미국에서 살면서 개척 시대 관련한 박물관을 여러군데 다니게 되었고, 궁금하던 석판을 직접 볼 기회가 많았다. 당시의 석판은 학교에서 쓰던 칠판, 분필들과는 조금 달랐다. 글씨가 잘 써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아 도대체 이걸로 어떻게 수학문제를 풀지? 싶을 정도의 질이었다.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긁는다는 것이 맞지 않나 싶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칠판의 질도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개발되고 발전되어온 것이다.
요즘 버전이라면 아이패드로 때려서 액정이 깨졌으려나? 혹은 아이패드는 너무 비싼 나머지 앤도 벌떡 일어섰다가도 차마 때리지 못하고 화를 속으로만 삭혔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길버트는 의도치않게 앤의 콤플렉스를 건드려 폭발하게 만들었다. 길버트는 다이애나의 머리가 까맣다고 '까마귀'라고 놀린 전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앤의 붉은 머리는 전체 인구의 1-2% 밖에 되지 않는 희귀한 컬러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창백한 얼굴, 주근깨, 옅은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는데, 앤은 전형적인 붉은 머리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앤의 컴플렉스 들이다.
앤은 어딜가나 아웃사이더였다. 초록색 지붕집에 오기 전에는 고아여서, 초록색 지붕집에 와서는 또래 여자 아이들과 외모가 다르고 독특해서, 더군다나 마릴래의 똥고집으로 옷까지 또래 가운데서 튀고 있었다. 길버트는 의도치 않았지만 그런 앤의 콤플렉스를 건드렸고 앤은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길버트를 한 대 쳐버린다. 길버트는 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지만 앤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놀렸던 길버트를 용서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학업적인 성취, 마릴라와 매슈의 지지, 다이애나와의 우정으로 앤의 자존감과 자아 효능감이 올라가면서 앤은 길버트를 용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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