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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이야기/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 연인의 오솔길은 낭만적이야

 

 

 

 

 

 

 

 

 

 

 

 

 

 

 

 

 

 

 

 

 

 

 

 

 

 

 

 

 

 

 

 

 

 

 

 

 

정말로 연인들이 걸어 다닌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다이애나하고 같이

정말 아름다운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 '연인의 오솔길'이 나오거든요.

우리도 그런 길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름도 참 예쁘잖아요.

무척 낭만적이고요!

 

 

 

 

 

 

 

 

 

 


 

 

 

 

캐번디쉬의 초록색 지붕집 박물관에는 연인의 오솔길 (Lover's Lane)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붙은 산책로가 있다. 소설 속, 앤이 등교하기 위해 지나가는 길이 바로 이 연인의 오솔길이다.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실제로 걸어본 연인의 오솔길은 좁고 소박했다. 이렇게 평범한 산책로는 앤과 다이애나의 상상력으로 인해 연인이 걸어다니는 낭만적인 길이 되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남편과 연인의 오솔길을 걸어보았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다이애나와 앤의 미팅 포인트였던 통나무 다리를 걸어보기도 하였다. 아주 작은 개울이 통나무 다리 아래로 지나갔다. 앤은 그 곳을 드라이어드(Dryad) 요정이 사는 곳이라고 상상하여 드라이어드의 샘(Dryad's Bubble)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작은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과 감사함을 찾는 앤이었다. 

 

나는 결혼 후, 남편의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그 곳은 주변에 크고 작은 호수와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시골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그저 경치가 아름답다!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걷게 되면서 무심코 지나쳤던 아름다운 풍경들은 모두 멋진 놀이터가 되었다. 오리들이 새끼를 낳는 봄이면 아이와 함께 집근처 연못이나 호수로 갔다. 알을 품는 오리가 하악질을 하며 경계하는 바람에 뒷걸음질치며 도망가기도 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새끼들이 부화했다. 아이는 여름 내내 오리 새끼들이 자라고 오리 부모와 함께 헤엄치며 먹이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했다. 빵을 챙겨가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였다. 생생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른들의 눈에는 당연하거나 시시해보이는 것도 아이들의 눈에는 큰 즐거움이며 그것은 아이들의 특권이다.

 

앤의 상상력은 뛰어나 선망을 받았지만, 사실 이 상상력이 과도하거나 나이에 맞지 않은 유치함으로 곤란함을 겪기도 했다. 주일학교에 들에 핀 꽃들을 꺾어 모자 장식을 만들어 등장한 것도 또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온 에피소드였다. 앤의 상상력은 가끔 다이애나조차 난감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드라이어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게 샘을 부르면 안된다고 정색을 하기도 하였다.

 

앤은 또래에 비해 과도하게 성숙한 면이 있지만 그와 정반대로 과도하게 미숙한 면이 있었다. 나는 이 원인을 앤의 잃어버린 유년시절에 있다고 생각한다. 앤은 재빨리 어른이 되어야했다. 굶지 않기 위해서는 눈치껏 집안일을 하고 아기들을 돌봐야했다. 어린 아이로써 충분히 누려야할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스무살이 되어서 갑자기 유치한 행동을 많이하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용 비닐 우산을 쓰고 대학교를 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문방구에서 분홍색 어린이용 손목시계를 구입하여 차고 다니기도 했는데, 시계줄을 맨 끝에 끼우면 아슬아슬하게 손목에 맞기는 했다. 주위에서 이게 뭐냐고 놀리기도 했지만 한 몇 개월은 줄기차게 그러고 다녔다. 어린 시절 이런 아이템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내 나름의 보상심리로 스무살 대학생이 그러고 다녔던거다. 몇 개월 하다보니 금새 시들해져 더이상은 찾지 않았다.

 

열한 살에 초록색 지붕집에 온 앤은 한국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에 해당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앤은 어린 아이로 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또래에 비해 유치하거나 미숙하거나 다듬어지지 못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껏 자신을 발산하는 시기를 보낸 앤은 정말 괜찮고 멋진 여성으로 성장한다. 아직도 나는 가끔 어린 시절 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게 해준다. 지금의 나이에서 생각하면 별 것 아니고 그다지 필요없는 것들도 많지만 이상하게 어렸을 때 간절히 바랬던 것을 나에게 해주면 허한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유치한 행동을 하나 할 때마다 나는 한 번 더 성숙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