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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이야기/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 마음의 벗, 다이애나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앤 :
손을 잡아야 해. 이렇게.

 

원래는 흐르는 물 위에서 해야 하는데.

우린 그냥 이 길에 물이 흐른다고 상상하자.

내가 먼저 할게.

 

나 앤 셜리는 해와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의 친구인 다이애나 배리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다이애나 :

나 다이애나 배리는 해와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의 친구인 앤 셜리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나는 친구가 별로 없고 사회성이 부족하다. 이렇게 쓰고 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나의 타고난 성향도 한 몫을 한다. 내향인이기 때문에 스트레스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센서티브(예민한 사람, HSP, Highly Sensitive Person), 엠패스(Empath), 내향인 같은 개념은 나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향적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사회성이 너무 부족했다. 하교길에 아이스크림이나 떡볶이를 사먹는 친구들을 멀뚱멀뚱 쳐다만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한 번은 하교길에 친구를 집으로 데려왔는데, 당시 실직했던 아빠가 집에 있었다. 친구는 천진난만하게 이렇게 물었다.

 

"아빠가 왜 집에 계셔?"

 

아빠도 나도 모두 당황한 순간이었다.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어? 아! 오늘 토, 토요일이잖아. 그러니까 일찍 오셨지. 하하."

 

당시는 주 5일제 시행전이었기에 토요일도 회사를 나갔었다.

 

그 이후로 나는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출근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을 들킬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대출금을 갚지 못해 집이 공매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까지 겹치자 나는 더욱더 나만의 고립된 세상으로 빠져버렸다.

 

친구들을 사귀기보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책 속의 세상에서는 초라한 집의 행색을, 달고나를 사먹을 수 없는 호주머니 사정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만의 세상에 빠질 수록 나는 또래들이 배우는 인간관계 (편가르기, 단짝 만들기, 이간질, 따돌림 등)를 배우지 못했다. 정글같은 학교에서 살아남으려면 교우관계가 필요한 것을 나는 꽤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인격이 성장하는 시기이기에 학창시절 누구나 관계 안에서 미숙하고 서툴다. 하지만 그 속에 뒤늦게 합류한 나는 남들보다 더 고군분투해야했다. 그러다 어느덧 하나 둘, 나를 받아주고 또 서로 의지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또래와 어울리는 즐거움, 직접 소통하고 교감하는 즐거움을 뒤늦게 안 것이다. 그 친구들 덕분에 행복한 추억도 많이 만들었고,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서로 배우고 가르쳐줄 수 있는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뒤에 이어진 직장생활이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자신 만의 세상 속에 살면서 또래나 건강한 성인과의 교류가 없었던 앤은 소설 초반 모나고 독특하고 이상한 성격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그런 앤을 데리고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또래 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앤에게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처음 <빨강머리앤>을 만났을 때, 나도 다이애나같은 친구가 생기길... 하고 바랬는데, 어느 덧 좋은 친구들이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나도 점점 둥글어지고 제법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