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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이야기/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 꼭 한 벌만 갖게 해주세요!

 

 

 

 

 

 

 

 

 

 

 

 

 

 

 

 

 

 

 

 

 

 

 

 

 

 

 

 

 

 

 

 

 

 

 

 

 

 

 

 

 

 

 

 

 

 

 

 

 

 

 

 

 

 


 

 

 

소매가 볼록한 원피스 한 벌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꼭 한 벌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는데.
사실 별로 기대도 안 했어.
하느님은 나 같은 고아가 입을 옷을
고민할 시간은 없을 테니까.

그래도 다행히 난 상상력이 있잖아.

저 옷들 중 하나가 아름다운 레이스 장식이 있고
삼단으로 부푼 볼록한 소매가 달린
눈처럼 하얀 모슬린 원피스라고 상상하면 돼.

빨강머리앤 중












 

 

 

 

 

 

 

마릴라와 매슈가 원체 검소하게 사는 탓에 나는 초록색 지붕집이 가난한 축에 속하는 줄 알았다. 사실 소설 속 그 어디에도 초록색 지붕집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글은 없었지만, 내가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니 내 환경을 주인공에게 무의식적으로 대입하여 추측했으리라. 앤이 유행하는 옷이 없어 소외감을 느낀 것이나, 발표회에 신을 예쁜 덧신이 없어 빌려신다가 샬롯타운의 조세핀 할머니에게 극적으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덧신을 받아 발표회에 서게 되었다던지 하는 에피소드들은 이런 나의 오해를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실제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를 방문하면서야 비로소 나 혼자 가졌던 오해를 풀 게 되었다. 마릴라와 매슈는 가난한 것이 아니라 검소했던 것이다. 시골이었지만 번듯한 2층 집이 있고, 그 주위를 둘러싼 넓은 농장과 감자 밭, 그리고 사과 과수원까지 가지고 있었다. 젖소나 닭, 말과 같은 가축까지 길렀으니... 적은 재산은 아니었다. 마릴라는 단지 극도로 검소한 취향을 가졌고, 그 취향을 꺾지 않을 정도로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을 뿐이다.

 

정말 가난한 계층은 매슈가 고용했던 프랑스 출신의 제리라던지. (제리는 앤과 같은 또래이지만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매슈의 농장에서 일손을 돕는다.) 캐나다에서도 볼 수 있었던 흑인과 같은 층들이었다. 사실 더 나아가지 않더라도 앤이 초록색 지붕집에 오기 전까지 머물렀던 가난한 가정집들이나 열악한 고아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초록색 지붕집의 살림이 흔들린 것은 매슈가 전 재산을 넣어두었던 애비은행이 부도가 나며서 전 재산을 잃고 나서였다. 특히, 이 충격으로 큰 노동력을 담당하였던 매슈가 죽으면서 농장 운영도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전까지 초록색 지붕집은 꽤 잘 운영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릴라가 앤을 키우면서 고집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하였는데, 앤이 나중에 샬롯타운의 퀸 학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브닝 드레스를 맞춰즐 정도였다. 물론, 마릴라와 매슈는 앤의 학비와 하숙 비용까지 지불해주었고 말이다.

 

나의 어머니는 마릴라의 고집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고집이 대단한 분이셨다. '6살이면 다 컸으니 인형은 필요없다'며 그 흔한 미미나 쥬쥬 인형을 사주지 않은 것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는 쌩뚱맞게 내가 수능을 보는 전날, 수능 선물이라며 미미 인형을 사주었다.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다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나보다.

 

또한 '학생은 교복을 입고 다니면 된다'는 굳은 신념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계셨는데, 중학교에 입학할 때 사준 교복으로 방과 후, 그리고 주말까지 다니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교복 외의 옷을 사주지 않았다. 마땅히 입을 옷이 없이 추레한 행색으로 한 시즌의 겨울 내내, 교회를 다닌 후에야 비로소 나는 겨울 외투 한 벌을 얻을 수 있었다.

 

고집 대마왕을 주양육자로 두며 사는 앤에게 나는 강하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었다. 도대체 소매가 불룩한 원피스를 만들어주면 되는 일을 왜 저렇게 마릴라는 엄격한 것일까 싶었다. 하지만 유행하는 아이템이 없어도 멋지고 당당하게 친구들과 지내는 앤의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갈 용기를 얻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