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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이야기/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 에이본리에서 마음의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전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책장 안에 사는 다른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그 애를 캐시 모리스라고 불렀고

우린 굉장히 친했어요.

전 그 애한테 모든 걸 숨김없이 말했어요.

캐시는 제 삶의 위로였고 위안이었어요.

 

우린 책장에 마법이 걸렸다고 상상했어요.

제가 주문만 알면 캐시 모리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러면 캐시 모리스가

제 손을 잡고 꽃과 햇빛과 요정들이 가득한

멋진 곳으로 데려가는 거죠.

거기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해먼드 아주머니 댁으로 갈 땐

캐시 모리스와 헤어져야 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캐시 모리스도 같은 마음이었구요.

 

어떻게 아냐면,

책장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작별의 입맞춤을 할 때

그 애도 울고 있었거든요.


- 빨강머리앤 중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작품은 자서전 적인 성격이 강하다. 주인공들이 죄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살고 있는 소녀들인데, 고아이고, 엄청난 공상에 빠져 살고 있다. 몽고메리 역시 21개월에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고아의 심리를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정말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농장 어디선가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먹거나 멋진 풍경에 넋을 잃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이 된다. 주변 인물들 역시, 실제로 몽고메리가 알고 있는 가깝고 먼 친척들이 모티브가 되었다.

 

몽고메리는 자신의 상상력을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많이 주었다. 그 중, 앤이 책장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게 '캐시 모리스'라고 이름을 붙이며 상상 친구를 만드는데 이 상상 친구 역시 사실은 몽고메리의 것이다.

 

고아였던 앤은 자신을 거둬주었던 몇몇 집을 오가며 살았는데, 그 가정들은 앤을 돌봐주기 위해 거둔 것이 아니라 앤의 노동력이 필요해서 앤을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외동 아들 한 명을 보는 나도 이렇게 버겁고 헉헉 거리는데... 고작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앤이 어린 아이들을 돌봐야했다니. 게다가 어린이집도 없고, 일회용 기저귀도 없던 시절이다. 요즘 세상이었다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취재하여 앤 구출 작전이라도 벌어졌을 일이다.

 

연고없는 타지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재택 근무를 하던 나는 온라인의 세상에 푹 빠져버렸다. 내가 가능한 시간에 그리고 집에서도 손쉽게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온라인에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며 사회적인 욕구를 해소했다. 토마스 아주머니네서 4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또래 친구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앤이 기회만 되면 책장 앞으로 달려가 '캐시 모리스'와 하염없이 대화를 나누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의 온라인 속 사교모임은 앤의 '캐시 모리스'처럼 적잖은 부작용을 선사했다. 바로 현실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묘한 이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온라인 속에서 이야기하는 주장들은 세상 밖으로 오면 별 것이 아니거나 혹은 극 소수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속에 있다보니 그것이 맞는 것 같고,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 같이 느껴졌다.

 

미국에 살 때는 미국 아줌마들이 모인 커뮤니티에 꼬박꼬박 출석 체크를 했다. 그 곳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이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어를 잘한다.', '엄마들끼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건 시간 낭비로 한심한 행동이다.' 하지만 누군가 댓글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이트 분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시더라구요. 하지만 제가 미국에 와서 보니 이 곳 아이들은 한국어로 말 걸어도 영어로 다 대답하더라구요. 한국어 잘하는 애는 한인 교회에서도 본 적이 없네요. 그리고 다들 우르르 잘만 몰려 다니며 관계 잘 맺던데요? 이 곳 분들이 주장하는 분들은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어요.'

 

날선 댓글이었지만 나는 그 댓글을 읽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온라인 세상 속에서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느라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놓치고 있던 것이다. 아이에게 완벽한 이중언어를 가르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생각하면 좀더 시간을 내어 좋은 친구들을 더 많이 사귀고 그들이 사는 현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면 어떨까 아쉬움이 든다.

 

초록색 지붕집에 온 앤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현실의 친구를 사귀게 된다. 하지만 그 전까지 앤이 알고 있는 관계란 대부분 본인 혼자 상상으로 만들어내거나 어디서 주어들은 이야기에 기초했기 때문에 장엄한 서사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현실의 또래 친구들에게는 다소 거북할 수 있는 말의 표현이 많았다. 과연 앤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상상의 틀 밖을 벗어나 현실 속 친구들과 사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