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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머 이야기/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초록색 지붕집으로 가는 길 // 볼록한 소매가 아직 유행하고 있어서 정말 기뻐요

 

 

 

 

 

 

 

 

 

 

 

 

 

 

 

 

 

 

 

 

 

 

 

 

 

 

 

 

 

 

 

 

 

 

 

 

 

 

 

 

 

 

 

 

 

 

 

 

 

 

 

마음에 들어요!
아, 아저씨! 아저씨,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요.
아,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매 좀 보세요!
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요.

퍼프 소매가 아직 유행하고 있어서 정말 기뻐요.
퍼프 소매 옷을 입어보지도 못하고
유행이 지나가 버리면
평생 한이 될 것 같았거든요.
절대 그냥 만족하지 못했겠죠.

 

 

 

 

 

 

 

 

 

 

 

 


 

 

 

 

 

앤이 초록색 지붕집으로 오고 1년이 훌~쩍 넘어서야 비로소 앤은 꿈에 그리던 유행하는 옷 한 벌을 얻게 된다. 세상 돌아가는 풍경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매슈가 우연히 앤의 옷차림이 또래 여학생들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릴라는 한결같이 수수하고 칙칙한 옷을, 늘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입혔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옷소매가 불룩하고, 허리 부분에 화사한 장식이 들어간 옷을 입고 있었다. 매슈는 앤에게 예쁜 원피스를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당시 옷을 산다는 것은 요즘과는 다르게 꽤나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먼저, 카모디에 있는 상점으로 마차를 끌고 가서 적절한 옷감을 구입한다. 그리고 나서 옷을 최신 유행하는 스타일로 바느질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맡겨야한다. 매슈는 첫번째 단계에서부터 난관이 부딪혔다. 스스로 옷감을 구입하지도 못했지만, 설사 옷감을 구입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천을 고르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스스로 앤의 옷을 장만하는데 실패한 매슈는 묘안을 생각해낸다. 에이본리 오지라퍼, 거칠지만 참견과 봉사를 좋아하는 린드 아주머니께 부탁한 것이다. 린드 아주머니는 흔쾌히 부탁을 수락한다. 순식간에 앤에게 어울리는 옷감과 옷의 스타일, 사이즈까지 구상해냈고, 2주 안에 뚝딱 옷을 만들어낸다. 사실 앤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싶었던 것은 매슈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가여운 아이가 한 번쯤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흐뭇할 거야. 마릴라가 입히는 옷들은 솔직히 말도 안 되잖아. 터놓고 말하고 싶었던 게 열두 번도 더 된다니까. 마릴라가 충고를 듣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안 한거지.

 

자기처럼 옷을 입히면 앤이 겸손한 마음을 기를 줄 아나본데, 시기심이나 불만만 키울 공산이 더 크지. 그 애도 자기 옷이 다른 여자애들이랑 다르다는 걸 틀림없이 느낄 테니까."

 

린드 아주머니는 매슈가 부탁한 옷에 어울리는 리본까지 만들어 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전한다. 앤에게 조세핀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인 덧신까지 신기니 매슈와 린드 아주머니 뿐 아니라, 다이애나와 온 에이본리 마을 사람들 속까지 뻥 뚫렸을 것이다. 앤도 부푼 소매에 용기를 얻어 첫 낭독을 성공적으로 끝낸다.

 

변변찮은 외투를 입고 다녔던 우리 남매에게 어느 날, 엄마는 코트 두 벌을 사가지고 왔다. 동생은 베이지색, 나는 하늘색 더플 코트였다. 200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더플 코트, 일명 '떡볶이단추' 코트는 가난했던 우리 동네 아이들도 모두 하나씩 가지고 있었던 최신 유행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막상 코트를 입고나니 조금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 코트들은 보통의 더플 코트 모양을 하고 있지만, 옷감은 그렇지 못한 탓이었다. 얇고 흐느적거리는 재질이었는데 한 친구는 이 코트를 가리켜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좋게 표현하자면 하늘거리는 코트'라고 정의할 정도였다. 폼도 안날 뿐더러 방한 효과까지 떨어지는 싸구려 코트를 겨울 내도록 입고 다녔다. 이 코트는 다음해에는 입을 수 없었는데, 드라이클리닝을 맡길 값어지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코트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지만, 얇은 교복만 입고 학교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나와 나이차이가 무려 8살이나 나는 친척 언니가 학창시절에 입던 검은 코트를 얻어왔다. 90년대 청춘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디자인이었지만 옷감은 좋았는지 보풀없이 깔끔했다. 다만 왕족들이나 달법한 거대한 황금 단추들이 달려 있어, 단추들을 모두 뜯어내고 검은색 단추로 모조리 바꿔 달고 다니니 썩 쓸만했다. 그렇게 또 한 해 겨울을 보냈다.

 

고 3으로 올라가는 겨울, 왠일로 한 저렴한 캐주얼 브랜드에서 엄마는 내게 더플 코트와 오리털 파카를 한 벌씩 사주었다. 모두 내 눈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투들이었는데, 또래들이 입고다니는 스타일과는 너무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선호도가 떨어지는 디자인이었기에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브랜드에서 사자고 실랑이를 버렸다가는 엄마의 오만 질타와 짜증을 받아내야했기에 그냥 군말없이 받았다. 특히, 오리털 파카는 용기를 내어 한 번 입긴했는데 친구들이 '근육맨' 잠바라고 놀리는 바람에 다시는 입고 다니지 못하고, 그대로 옷장에 걸리게 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번듯한 외투를 얻게 되었지만 정작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그래도 더플 코트는 꽤 괜찮았다. 물론, 더플 코트의 유행이 끝나가고 있어 슬슬 사람들이 안입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새로산 코트를 입고 교회에 갔는데 나보다 교회 집사님, 권사님들이 더 호들갑이었다. '어머, 썸머 옷 새로 샀네!'라고 감탄을 연발했고, 엄마는 그 옆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여 '대입 선물을 1년 미리 앞당겨 주었다'고 말했다. 나는 뒷통수에서 호들갑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코트 하나 산 것이 그토록 큰 뉴스거리인가 의아했다.

 

이 의문증이 풀린 것은 앤의 소매가 둥근 유행하는 원피스 사건을 다시 읽으면서였다. 사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초라한 행색으로 다니고 있었던 것을 다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새 옷을 비로소 얻게 되었을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던 것은 그만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떡볶이 코트의 유행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그 다음해 겨울부터는 유행이 지난 올드한 스타일의 옷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앤의 말처럼 입어보지도 못하고 유행이 지나갔다면 평생 한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 번 해봤으니까 미련도 아쉬움도 없어졌고, 매일 입을 외투가 없어 고민했던 시간들도 희미해졌다.

 

상처나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방법 중 하나로 나는 여전히 이 방법을 쓰고 있다. 유행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설사 지금은 필요가 없더라도 해보지 못해 서럽거나 갖지 못해 슬펐던 것들을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주는 것이다. 생각보다 큰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