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할머니는 약속대로 우리에게 손님방을 주셨어요.
방은 정말 우아했지만, 손님방에서 자 보니
어쩐지 제가 늘 생각했던 것과 달랐어요, 아주머니.
어른이 되어 간다는 건 그런 나쁜 점이 있는 거 같아요.
이제는 조금씩 알 거 같아요.
어릴 땐 그렇게 간절히 바랐던 소원들도
막상 이루어지면 상상했던 절반만큼도
멋지거나 신나지 않는 거 같아요.
<빨강머리앤> 중
앤이 에이본리에 잘 적응해나갈 무렵, 다이애나의 고모 할머니인 조세핀 배리가 에이본리에 등장한다. 조세핀 배리 할머니는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은 절대 신경 쓰지 않는 다소 이기적인 노인네이다. 생긴건 어떤가. 마른 몸에 엄하고 꼬장꼬장해보이는 인상까지 풍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세핀 할머니는 돈이 많기 때문에 환영받는 존재였다. 엄격한 다이애나의 어머니, 배리 부인 조차 어떻게 할머니께 다이애나의 과외비라도 도움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살뜰이 모시는 분위기이다.
이 꼬장꼬장한 조세핀 할머니는 앤에게 큰 흥미를 느꼈고, 한 달이 넘도록 에이본리에 머물며 앤과 대화를 나누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앤 덕분에 조세핀 할머니의 바이오 리듬이 좋아진 것은 배리 씨 가족들에게도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시내로 돌아간 조세핀 할머니는 앤을 잊지 않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앤과 친구들이 '이야기회'에서 썼던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주는 독자가 된다. 앤이 샬롯타운의 퀸 학원에 입학시험을 치를 때, 머물 곳을 제공하고 퀸 학원에 재학하는 동안 살 수 있는 명망있는 하숙집을 구해준 것도 모두 조세핀 할머니였다. 조세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앤에게 유산까지 남겨준다. 매슈의 죽음과 에비 은행 부도 사건으로 초록색 지붕집의 가세가 기울어져, 대학을 포기하였던 앤은 조세핀의 유산 덕분에 다시 학업을 시작하게 된다.
가장 큰 이벤트는 앤과 다이애나를 샬롯타운으로 초대해준 일일테다. 샬롯타운에서 조세핀 할머니와 보냈던 나흘의 시간은 앤 인생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꼽힐 정도로 근사하고 설레였던 시간이었다. 으리으리한 저택 '너도밤나무집'도 시골 아이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박람회장, 경마, 음악회 등 난생 처음 겪는 멋진 경험들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약속대로 손님용 침실을 이용하게 해주어 앤은 어른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을테다.
조세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보니 그녀는 누구나 꿈꾸었던 '키다리 아저씨'같은 존재였다. 삶이 너무 막막하고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짠하고 나타나 도움을 주는 존재 말이다. 물론, 이런 존재에 대한 갈망은 실현되기 어려운 로망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사주나 운세에서 '귀인'이 언제 어느 방향에서 나타나는지 자주 언급하는 걸 보면 우리의 조상들도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를 내심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조세핀 할머니 같은 친척들이 있었다. 집에서는 엄마의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학교에서는 소외되고 이상한 아이로 살았지만, 외갓댁에만 가면 평범하고 행복한 아이가 될 수 있었다. 외갓댁에는 옆집과 앞집에 친척들이 모여살았고, 당시 고등학생이던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놀아주는 재미, 몇 살 차이나지 않는 사촌들과 놀던 즐거움이 있다. 집에서 음식을 모두 만들어먹던 시절, 어른들이 손이 큰 덕에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엌의 음식은 늘 풍족했다.
한 번은 외삼촌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피자를 사준 적이 있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음식이라 쭈뼛거리고 있으니, 나이프를 들어 슥슥 잘라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처음 먹어본 피자는 왠 희안한 맛이었다. 그 맛이란 우유향이 나는 고무를 씹는 느낌이었다. 피자에 익숙해질때까지 나는 친척 어른들에게 몇 번의 피자를 더 얻어먹었다.
그 외에도 나와 동생을 데리고 여의도 수영장이나 놀이공원을 데리고 가주거나, 계곡에서 튜브보트를 태워주거나, 근사한 장난감이나 유행하는 옷을 사준 것도 모두 엄마의 손아래 형제들이었다. 외삼촌은 차를 사서 나와 동생을 태워 드라이브를 시켜주기도 하였다. 그래봤자 낡은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정도였지만 높은 곳에서 무섭다며 소리를 지르거나 능숙하게 운전하는 삼촌의 모습을 바라본 것들이 모두 추억이었다. 집근처를 지나다 우리 생각이 나서 떡볶이를 사서 들리는 삼촌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흡입하기도 했다. 엄마는 미원 덩어리라며 경멸해 마지않는 학교 앞 떡볶이였기에 집에서는 먹을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음식이다.
이모 중 한 명은 취업을 하고 내게 선물을 사주었다. 가지고 있는아이가 흔치 않았던 미미의 집이었다. 분홍색 플라스틱의 미미의 집은 인형을 눕힐 수 있는 침대와 인형 옷을 걸 수 있는 옷장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는 햇빛이 들지 않는 낡은 흙집에서 미미의 집을 가지고 놀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모는 아무 생각없이 '인형 미포함'이라고 적힌 박스를 사가지고 왔는데, '인형 포함'이라고 적힌 박스보다 1만 5천원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이모가 몰랐던 사실은 나에게는 마론 인형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텅빈 미미의 집을 펼쳐놓고 100원을 주고 산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 그래도 남들은 가지지 못한 물건을 가졌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한 경험들은 부모의 방임으로 인해 낮아질대로 낮아져버린 나의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오랫동안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부모라면 당연히 해줘야하는 것 아닌가 싶은 평범한 것들은 나에게는 하나하나 기억에 남을 만한 큰 이벤트였다.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킬겸 집근처를 걷다가 야시장에 들렸다. 아이는 동물 모양의 솜사탕을 사달라고 했다. 솜사탕 1개에 5천원이었다. 조금 망설여졌다. 아이 간식에 5천원이라니! 하지만 5천원으로 아이에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저렴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줄을 섰고,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모양을 골라 의기양양하게 들고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도 연신 사진을 찍고, 병아리의 꼬리를 먹었다 부리를 먹었다하며 방방 뛰어다녔다.
절약도 좋고, 자산에 투자하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살 날 동안 곱씹으며 추억할 수 있는 행복도 저금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정말 힘들 때, 우리는 그 기억에 다시 힘을 얻을 테니까. 아이도 언젠가 힘든 순간, 병아리 솜사탕을 사들고 엄마, 아빠와 집으로 걸어왔던 그 길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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