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고아원을 나올 때
너무 창피했어요.
기차에 오르자 사람들이 저만 쳐다보며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았는데,
곧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다고 상상하기 시작했죠.
그러자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섬까지 오는 동안
여행을 마음껏 즐겼어요.
노바 스코샤 주의 고아원에 있던 앤은 기차를 타고 프린스 에드워드 섬으로 온다. 마릴라와 매슈가 흰모래마을에 사는 스펜서 부인에게 매슈의 농장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중간에 말이 꼬이게 되어 스펜서 부인은 여자 아이인 앤을 데리고 온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앤은 드디어 자신의 집이 생겼다는 꿈에 부풀어 프린스 에드워드 섬까지 오게 된다.
앤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브라이트 리버 기차역이다. 소설 속 지명은 브라이트 리버 기차역이지만 실제 지명은 켄싱턴 기차역이다. 에이본리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기 때문에, 앤은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매슈가 마차를 가지고 앤을 데리러 가기로 한다.
아이와 함께 지금은 열차가 다니지 않는 역을 둘러보았다. 작은 기차역 건물은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선로 저 끝에는 증기기관차가 서 있었다. 딱히 할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괜시리 승강장 벤치에 가만히 앉아보기도 했다.
인생 일대의 중요한 날, 앤은 매무새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하지만 앤이 가진 것은 볼품없이 몸에 꼭 끼는 원피스 뿐이었다. 한 상인이 누런 빛이 옷감을 300마나 고아원에 기부하였고, 덕분에 모든 고아원 아이들이 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그나마도 옷감이 넉넉치 않았는지 옷은 아주 짧고 몸에 꽉 끼었다. 거기에 앤은 색이 바래고 납작한 밀집모자를 썼고, 다 해진 구식 여행용 가방을 들고 와야했다. 그런 차림을 한 앤은 기차에 오르자 사람들이 자신만 쳐다보며 불쌍히 여기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빨강머리앤을 여러차례 읽어도 이 장면에서 나는 늘 먹먹해졌다. 나 역시 앤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평일에야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면 되니 큰 걱정은 없었다. 그저 동네 시장에서 산 운동화가 금새 헤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신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일요일 아침마다 나는 괜시리 옷장을 뒤적였다. 마치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럴듯한 옷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지만 봄이 될 때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옷장 속에서 씨름해보지만 겨울 내내 나는 늘 똑같은 옷을 입고 나갔다. 유일하게 멀쩡한 긴 바지인 청바지를 입고, 누군가에게 물려입은 낡은 잠바(역시 유일한 겨울 아우터)를 걸치고 말이다. 그렇게 교회를 가면 예배시간 내내 같은 반 여학생들의 겉옷에 자꾸 시선이 갔다. 가난한 동네에 살았던 탓에 브랜드 있는 외투를 입은 아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들 명동이나 이대에서 몇 만원을 주고 구입한 얇은 코트는 입고 있었다. 싸구려 코트를 걸친 아이들은 옷에 붙은 먼지를 수시로 떼기도 하고, 서로의 옷을 칭찬하며 교회 옥상을 괜시리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다. 어쩐지 대화에 끼지 못한 나는 괜시리 낡은 잠바의 소매끝만 쳐다보곤 했다.
그래서 볼품없는 차림에도 당당했던 앤이 좋았다. 예순이 넘은 매슈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며 통성명을 하고,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어갔다. 주눅이 들 때면 멋진 상상력을 동원하여 스스로의 결핍을 채워주었다. 내가 초라하고 웅그려졌던 순간, 이따금 빌렸던 앤의 상상력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앤은 꿈꾸던 옷을 실제로 얻게 되었고 나도 이듬해 겨울에는 상표는 없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검은 패딩을 하나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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